2007/10/08
아버지와 나. 2007/05/11
아빠가 첨으로 사준 알마니 반지인데 장례식하느라 헐거워졌는지...잃어버렸다. 속상해.
2007/10/08
안유진,김현수, 김지수 모두 아버지를 닮았다.
2007/11/28
일년전 조카 안유진 생일.홍대앞 베니건스.
조금 늦게 도착한 나는 칵테일을 시켰고,역시 귀가길은 아버지가 운전을 하셨다.당시 엄마는 일본에 계셨고 오빠네는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작년 연말 가을 겨울은 이렇게 우리들끼리 만났다.아빠, 언니, 형부, 안유진 그리고 나.이젠 다른 사람들은 다 있는데... 아버지는 없다
2007/11/28
일년전 아버지 생신.2006년 11월28일.신촌의 어느 퓨전 중국요리집.그날 나는 새로산 아이팟을 자랑했고 아버지는 뭐 어떻게 하는거냐 등 물어 오셨지만 긴 설명이 귀찮았던 나는 대강 몰라도 된다는 뉘앙스로 지나가려 아버지를 무시하듯 귀한 아이팟을 확 뺏었다. (막 돼먹은 지애씨.) 아버지 생신이라 공보가주가 서비스로 나왔는데 역시 내가 다 마셨고 집에 가는길은 아버지가 운전을 하셨지
2007/11/28
오늘은 아버지 생신이다. 작년 아버지 생신... 2006년 오늘, 아버지가 안 계실지는 정말 몰랐네.아버진 술을 드시진 않았지만,계절마다 온갖 과일주를 담그셨고 그 술을 마시는 이는 유일하게도 바로 나였다.난 집에 들어간 후 꼭 아버지가 담그신 매실주, 솔잎주 등을 마시곤 했는데, 아버지는 매번 '너무 많이 마시지 마라' 하시면서도 호두나오징어등을 같이 먹으라고 챙겨주시곤 하셨다.(이때도 나는 오징어는 이에 껴서 싫어! 이런말을 했다. 막 돼먹은 지애씨.)아버지 장례식 후 참 많이 울었던 어느날이 있었는데...일년을 마시고도 남을 모과주와 매실주를 발견 했던 때였던 것 같다. 한참 눈물이 났고, 다음날 그리고 또 다음날 까지 눈물이 노래로 흘렀다.그립다.이 그리움이 어느때나 되면 기분좋은 그리움이 될까...오늘은 1938년 11월 28일생 김대곤씨의 70번째 생일.하늘나라에선 첫 번째겠네.누구랑 같이 계세요?... 나의 아버지 . 김.대. 곤.내년 3월엔 중요한 개인전 .여전히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나는 또, 아버지 김대곤이 그립다. '아빠 그림이 안돼. 기도해줘.' 아빠, 그림 그리는 길은 너무 고독해...' 이런 얘기를 하면서 펑펑 울어대던 나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면서 '울지말고...'한마디 하시던 나의 아버지 김대곤. 언제부터인가, 아빠와 전화할때 끊는 인사는 '울지말고' .그 말이 되었던 때는...아빠한테 전화가 하고 싶다.
2007/12/15
아빠의 30대. 정말 잘 생겼다.
2008/05/11
아빠를 닮은 안유진과 아빠의 차 아토스.
1년전 오늘. 아빠가 돌아가셨다.벌써 일년이 되었네.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너무나 좋았겠다는 생각이 드는 숱한 순간 순간 들이 쌓이더니 어느새 세월이란 가고 또 간다.휴대폰 메모란엔 돌아가시기 삼일전부터의 바램들이 빼곡이 적혀 있는데 하루는 말씀만 하셨으면, 그 다음날엔 지금 이대로라도...깊은 슬픔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버지 묘지에 가보니... 이제는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사실을 받아 들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일년전 비석과 달라진 것은 훈장이 새겨 진것, 그리고 아버지 묘소있는 그 허했던 구역이 빼곡이 다른 분들도 함께 들어와 계셨다. 참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난다. 아직도 아버지를 향한 보고싶은 마음이나 미안한 마음은 기분좋은 그리움이 되려면 멀었지만 난 이렇게 아버지의 딸로서 어디선가 보고계실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조금은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마음을 먹어본다.아버지는 중환자실에만 45일을 계셨다.정말 매일매일이 고비였는데 어느날 새벽 그 고비를 잘 넘기신 아빠는 내게 찬송가 405장을 불러달라고 하셨다. 근데 그 순간 그 유명한 찬송가가 기억이 안나서 아픈데다가 말씀도 못하시는 아버지께 다른 찬송가로 하자고 막 우기면서 온갖 가사를 다 지어내서 불렀던 기억이 난다. 우측이 다 마비 되셨던 아버지는 내 엉터리 찬송가에 맞춰서 왼발을 까닥까닥 움직이시며 박자를 맞추셨지. '아빠 너무 잘 참았어. 힘들었지...?' 이렇게 물어 본 내 손바닥에 '니가 있어서..' 라고 힘겹게 글씨를 쓰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를 아무리 보고 싶어해도 난 볼 수가 없다는 것을 1년이 지나서야 실감을 하는 나. 정말 아직도 아직도 철이 없구나.그 철없음은 하소연 할 곳이라도 찾듯이 여기에 글을 쓰게 만든것 같다. '울지 말고....' 아버지 목소리가 마음으로 들리는 오늘 아버지를 너무나 그리워하는 37번째 생일맞이 싱글녀씀
2007/12/15
*사진; 아버지의 얼굴을 제일 많이 닮은 나의 조카 김지수.
2006년11월 어느날.작업실에서 집에 와보니 부엌과 거실에 수북하게 배추20포기와 아주 많은 무우들이 놓여 있었다.
당시는 아버지가 심장병으로 두번이나 쓰러지신 후 였고, 나는 나 나름대로 큰고모와 작은아버지가 주무시다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경험이 있는지라, 작업실에 있다가도 혹시라도 아버지가 돌아가신건 아닐까하는 이상한 노이로제에 걸려 새벽에 두어번씩 집으로 작업실로 왔다갔다 하면서 주무시는 아버지의 숨소리를 확인하고서야 안심을 하곤 했었던 때였건만 수북이 쌓인 무우와 배추를 보는순간 화가 나서 견딜수가 없었다. 아빠는 힘든일 하면 안되는데, 아빠는 무거운거 들면 안되는데...그러면서 아빠가 김장을 왜 하냐고, 소리를 질러대는 나와 그냥 조용히 '김장은 해야지...,' 하는 아버지,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냥 두어 포기만 담그면 되지 이게 뭐냐, 난 절대 안 도와 줄꺼라고 질질 짜대면서 이 무우는 뭐냐, 배추는 왜이리 많냐 생 난리를 떨었다. '물김치도 담궈야지...,' 하는 나의 아버지. 나의 통곡의 전화를 받은 언니는 주말에 언니가 같이한다고 했고 난 그날 안 올꺼라고 엉엉엉 울면서 땡깡을 부렸지.절대로 혼자서 하지 않기로 못을 박았건만 다음날 아빠는 역시나 소금에 다 절여 놓으셨고 거기엔 또 생지랄을 떠는 나와 '그냥 절여 놓기만 한거야' 하는 조용하고 섬세한 아버지가 있었다.8시간 지나면 일어나서 내가 헹구기라도 하리라 다짐을 했지만 역시나 못했고..., 김장 당일 아침 그냥 후다닥 울면서 퉁퉁퉁 집을 나왔다.무거운 마음덩어리 김지애는 그냥 작업실에서 울구불구 혼자 있다가 집에 갔고 이미 시집에서 김장을 했던 착한 언니가 와서 아빠와 김치를 다 담궈 놓았다.그 날 난 면목이 없기는 커녕 당연하고 떳떳하게 바가지 하나 씻지 않았고, 나는 나쁜 딸, 나쁜 동생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그 물김치는 남아 있었다.난 아버지를 정말 사랑하고 위했는데 당시는, 왜 하필이면 그 때는 내가 그모양, 그 꼴이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아빠가 빨리 죽는거 싫어! 아빠가 힘들게 일하면 아빠가 죽을 까봐 싫다고 말만 해대고 집안일도, 김장도 아무것도 안 하면서 화만내고 울고불고만 하던 하루 하루였는데 ...그 하루하루가 아버지와의 마지막 겨울일 줄은 정말 몰랐다.그날..., 김치라도 함께 담궜다면 이렇게 슬프지는 않았을텐데...,겉절이 하나 싸서 입에 넣어줬다면 조금은 덜 아플수 있는걸까...슬픔은 아직도 아픈 추억만을 꺼내고 무어라 핑게도 댈수 없는 시간들은 또 흐르고 흘러 눈물 노래를 부른다.
2008/0/01
아버지가 가장 좋아했던 그림.
Fly Together시리즈 첫 그림인데 무언의 소통이었는지 아버지는 몇 차례나 이 그림을 가장 좋아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그림을 계기로 지금까지 나는 회전목마의 깊이와 상상과 이야기를 가져올 수 있었고 그 덕에 나의 전성기나 지금의 그림도 있는 것 같다. 나는 꿈을 많이 꾼다. 항상 악몽에 시달렸고 아버지는 자다가 소리 지르는 내게 와서는 ‘왜 그래?’ 하시고, 나는 손을 내 저으며 ‘꿈’. 이렇게 아버지와 나는 나의 악몽을 나누며 몇 년을 보냈었다. 나의 악몽은 언제나 Jump다.
이공간의 그 빠른 속도는 나를 지치게 했고 무엇이 먼저인지 나는 화가로서 큰 슬럼프를 겪었었고 지금은 한 걸음씩 나아지고 있다. 횟수는 줄어들고 길이도 짧아졌거니와 흘리는 땀방울도 덜 뜨거워지고 있다. 최근엔 이사를 앞두고 맘이 좋은 건지, 편해서인지, 낮잠을 잘 때가 많은데 그 속편한 게으른 낮잠 속 악몽의 끄트머리엔 아버지가 정면으로 나오시곤 한다. 항상 카키색 잠바를 입고 배낭을 메고 있는 모습인데..., 내가 ‘아빠’ 하고 부르면 , 그 순간 나는 이 몽중 여정이 아빠를 만나기 위함이었구나 하며 기뻐 ‘아빠’를 불러대지만 그 부름 후엔 여지없이 어디론가 가버리는 나의 아버지. 예전의 그 비명과 식은땀처럼 깨어난 나의 우는 가슴은 울렁임을 멈추기가 힘이 든다. 겨우 거울을 보며 현실을 깨닫는 나는... 속으로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한마디 할 뿐이다. 내가 광장한 색채의 악몽에 익숙해졌을 때의 나는 꿈속에서도 ‘이것은 꿈이고 , 이 꿈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난 달리를 넘어 설 것이다’라고 자조하곤 했었는데... 요즘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일산으로 이사를 가니 뉴욕은 아닐지라도 새롭게 시작하고 새 마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나 자책이나 후회도 접으라는 생각을 나의 몽중에 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난 아직도 그림으로 옮기기는커녕 울다 지쳐 깨어나곤 하니, 참 아직도 긴 터널이네. 지나가겠지...
2008/07/15
사진:2003년 4월5일 5번째 개인전, 문화일보갤러리. 아버지절친들과함께
내가 가장 아버지가 그리울때
1. 좋은 일이 있을때;
-2006년 꼭 한번은 타고 싶었던 상이 있었다.
난 대수롭지 않게 아버지한테 말했고 ...시상식에 아버지가 오신다는걸 ... 못. 오게..했다. 그냥 별것도 아닌데 호들갑 떠는 것은 쿨 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데뷔하고 두어번 방송에 나간적이 있다. 그것도 꼭 보라고 말도 안했다. -그래도 그런 모든 얘기들을 아버지 한테 제일 먼저 했던 나.슬프거나, 화나거나, 기쁘거나 ... 아버지는 언제나 같은 말을 하셨다. '감사해라...'
-지금 나는 실컷 좋은 일을 떠벌려도 허무함이랄까 아니면 허전함이랄까 이런것들이 있는데... 그 이유를 나는 안다.그것은 최고의 내'편'때문인 것 같은데... - 내가 어떻게 이러한 마음을 몹시 긍정적으로, 그리스도 인답게,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넘어갈수 있을까...를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언제나... 내 마음이 중간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처음 알게 된 사실은... 우리 아버지 처럼 수줍고 말 없으신 분도 우리 삼남매에 대한 '자랑'을 친구들에게 하셨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버지와 가장 친해서 '니 아버지가 나 한테만 그 카더라' 하는 류의 아버지의 친구분 몇분께 그 말씀을 들었다. -그 날... 그리고 오늘까지 후회는 하늘을 덮는다.
2.결혼에 대해 시달릴때;
- 내가 하기 싫어서 안하는게 아닌데...
이래저래 주기적인 압박에 시달릴때면 그때마다 내 의견을 '아빠만 알고 있어!'라고 윽박 지를 수 없음이 절감된다. 난 아빠가 없다.아빠만 알고 말하지말라고 당부 하지 않아도 나를 마음으로 걱정하고 침묵으로 기도해 줄 아빠가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난 아버지한테 내 결혼관에 대해 다 말했는데... 아버지는 그런 나를 옹호해 줄 만한 시간도 없이 돌아 가셨으니... -난 크리스챤이니 하느님의 뜻만 바라보고 있어야 되는걸까...-그것은 도데체 무언지...-시달리고 있다.-이미 결혼 했으면 당하지 않아도 될일을 71년 생인데도 결혼하지 않았기때문에 내가 감수 해야 하는 일은... 세다.
-아빠.....-니가 부모라고 생각해 봐라.-이렇게 아버지는 말씀하셨을꺼다. -그러면 나는 또 이렇게 말했겠지.-나는 오죽하겠어요.... -나라고 가족이 오손도손 함께있는 모습이 안 부러울리 있겠나, 나라고 자기편이 있는데다가 자기 인생을 살게 하는 이유를 가진 자기 식구있는 여자들이 안 부러울까...-솔직히... 아빠만 살아계시다면 ... 난 아무하고 라도 결혼 할 수 있을 것 같다.굳이 그것이 소원이라면...-그러나, 그런 '아무나'도 없는데...어쩌란 말인지...HUE. 짜증썩인 한숨만 자리하는 오늘이다.
2008/05/15
2006년 11월이었는지, 10월이었는지...
우리 교회에 있는 '유언장' 형식에 맞추어 내 유언장을 쓰고 있었다. 즐겨하는 찬송, 좋아하는 성경구절, 인생의 좌우명, 남기고 싶은 유언,비석에 새기고 싶은 말, 장기기증에 대한 동의, 원하는 시신 처리, 특별히 장례 절차에 부탁하고 싶은 것들 그리고 기계로 생명을 유지하게 되었을 때 의 허락 여부와 인생의 중요한 사건3가지위주의 자기 소개...신중히 나의 장례식을 상상하며 글을 쓰던 중 아버지는 좋아하는 찬송가가 뭐지? 이렇게 궁금함을 가지다가 아버지의 유언장도 받아 놔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실천하지 않았다. 그냥 '나도 썼으니 아빠도 써놔' 이렇게 말하면 아마도 아버지는 그 잘 쓰시는 글씨체로 사려깊게 쓰셨을 것 같은데 혹시라도, 이미 그해 8월 쓰러지신적이 있는 아버지가 맘 상하실까봐 하는 마음 하나와 웬지 아버지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게 될 상황이 진짜로 올까봐 하는 그 두 마음으로 나는 아빠와 둘이 있는 시간이 제일 많았던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하지 못했고 그냥 천천히 '아빠는 무슨 찬송가가 젤 좋아?' 이런식으로 하나씩 알아놔야 겠다는 쉬운 생각만 가지고 있었나보다. 세월이 길 줄 알았다.지금 나는 아빠의 유언장을 받아 놓지 못한것이 참 후회된다.
막상 돌아가시기 전 45일간은 단 한마디도 못하셨기에 유언 하나 새기지 못했던 것이 참 서운하다고 할까...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의 죽음을 예상할 수 있는 환자였는데도 나를 비롯한 우리 가족은 돌아가시는 아침까지도 진짜 돌아가실줄은 몰랐기에 무언가 당부나 격려나 바램하나 들으려 하지 않았달까. 좀 더 담담하게 했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좀 더 멋지게 보내드릴수 있었을 텐데....이런 생각이 5월이 다가는 빗소리속에도 가시질 않는다. 혹 다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꼭 유언장을 받아놓을텐데말이다. 겨우겨우 힘겹게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실때 '인애하신 구세주여'랑 '삼천리반도 금수강산(군인이셨던 아버지는 역시 일을 열심히하자는 건설적인 노래를 선택) ' 을 좋아하신다는것은 알았는데 그 외에는 대화 나누기가 어려웠다. 나비들은 모두 다음 나비의 첫 비행을 준비하도록 교훈을 주는 것 같다.
대학때 날아간 인배는 그저 당황하기만했던 내게 죽음이라는 실체를 알려줬고, 아버지는 후회하는 내게 중환자 돌보는 법을, 그래서 이경선한테 마사지 하나는 아버지한테 했던 것 보다 체계적으로 할 수 있었는데... 이 모든 나비들은 이제 내게 '유언'을 꼭 들을 것을 알려준다.
생명이란 배는 모두 죽음 이라는 정착지를 향해 항해하는 법.
그 죽음 이란 항구에는 환영해 주는 기쁨의 손들이 기다리고 있을테니 좀 더 경건하게 좀 더 공손히 배를 움직일 줄 알아야 겠다.오늘은 작업실에서 빤히 나를 바라보시는 아버지를 백지로 가려버렸다. 내가 그 눈을 똑 바로 당당하게 바라 볼 수 있을때 까지 그 종이는 떼지 않으리.
- 내 인생에 중요했던 3가지 사건 기록에서 항상 막혀버리는 나.
2009/05/10
그림제목; 산소의 그 여자/그린이; 안유진 9살/그린날; 5/9
아버지 기일 2주기가 벌써 왔다.미국에 있는 오빠가족을 제외한 우리 가족들은 또 한번 대전 현충원 아버지의 뼈가 있는 곳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예배중 안유진은 나를 보면서 그림을 그렸고 아버지가 없는 나의 암울한 마음을 스산하게도 표현하여 암흑의 아우라를 가득 그림속에 담아 냈다. 그림 우측 상단에 흐리게 써있는 제목은 '산소의 그 여자'.
제목은 많은 선별 끝에 이루어 졌는데 후보로는 '무덤 여인'도 잇었고 '무덤에 묻힌 여자'도 잇었다. 내가 강조 하는 의미로 '그'를 넣자고 하여 제목 낙찰. 발톱까지 관찰하여 앉은 자세를 그렸고 배경의 비석에 새긴 글 귀까지 내가 어디에 있는가를 절묘하게 알려주며 한 작품 완성. 김지애는 이 날 우중충했나보다.
나는 예전처럼 많이 울지 않았다.눈물노래로 내 안의 모든 진을 다 쓸어버리는 일도 이젠 드물다.
익숙해 진다기 보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훈련 성적이 좋아진다고 해야 할까.나에게 아버지는 내가 존재하는 이유이셨다.
학창시절부터 대학생 시절까지 아버지 속을 무진장 상하게 해 드렸던 나는 그러하기에 아빠의 막힌 혈관이 나로 인한거라고 자책할 만큼 아버지가 참아야 하는 상황을 많이도 만들어 드렸었다.심지어 아버지가 퇴직하셨던 94년 그 해 겨울 때마침 내가 많이 아팠는데 그로인해 아버지의 퇴직은 가족의 신경밖이되었고 퇴직하신 아버지가 병원에서 내 병수발을 하셨었다. 매일 같이 있었지만 나는 내가 왜 그러는지, 왜 아픈지 아무 말도 안했고 아버지 역시 묻지 않으셨다.
날 데리고 통일전망대도 데려가시고 우린 아무말도 없이 냉면도 먹고, 나의 기분을 좋게 하시려고 아버지는 정말 노력에 노력을 하셨다.시간이 조금 더 흘렀을때 아버지는 내게 아파트 경비자리를 알아보신다고 당신도 뭔가 일을 찾을 테니깐 너도 빨리 기운을 내라고 하셨었지. 난 그 말을 듣고 평생을 일했는데 무슨 경비야, 좀 쉬어, 이런 생각은 속으로만 하고 대답도 안했었다. 아버지는 나와 비슷한 점이 '주부체질' 이란 것과 활동적으로 일을 벌이는걸 싫어 하는건데 나 때문에 퇴직하시고도 돈 걱정을 하시고 경비일을 해 보시겠다고 하시니 지금 이 죄스러운 마음은 어쩔도리가 없다. 이 얘기도 아버지가 돌아가실때쯤 언니 오빠에게 해 주었었는데 모두 울었다.
세월이 흘러 내가 정신을 차린 후 난 우리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면 된다고 생각했었고 그 생각이 내가 그림을 그리고 전시를 하고 상을 타고 하루하루 발전 하는 목적이 되었던 것 같다.너무 지은 죄가 커서....그리고 너무 아버지가 좋아서.
갚을 생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일년에 한두번 전시하고 아빠랑 친구들 오시면 식사도 사드리고 주무시기 전엔 발도 만져드리는 ...그 정도 였는데...그래서...나.. 솔직히... 무슨일을 해도,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싶은 대상이 사라진 그 허공이 먼저 나를 깨운다.
이제 이년이나 지났는데... 작업실도 옮겼는데...잘 살아야지. 또 다짐을 한다.
억지로 죽음은 소통이라고 다독일때도 있고, 억지로 미사어구로 장식해 보기도 한다. 사람들 말처럼 '아버지가 다 보고 계실꺼에요' 라는 말을 믿는척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난 아직 '단절'이 너무 크다.내 기독교적 신앙의 근원이 흔들릴만큼.
빨리 그림을 시작 하고 싶다.
2009/05/19
Run to your yellow hand
91.0*72.7cm/oil,pencil,colorpen, hanji on canvas/2008
:To. Dear Kim Daegon
From. your lovely daughter Jieh May 2008
병중의 아버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Permenent yellow Deep이었고 손을 잡아보면 나의 손은 민망할 정도의 그야말로 살색 June Brilliant #3 였다.
2009/07/13
2000년 3월첫개인전 오프닝날. 덕원갤러리.
요즘은 TV를 일산 작업실에서 구로동 집으로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제시간마다 꼬박 챙겨보는 드라마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찬란한 유산'이다.이승기와 한효주(다리가 예술인데 단 한번만 보여주었슴)가 주인공인데 다른 조연들도 그 캐릭터가 한자리씩 빠져서는 안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심지어 설렁탕집 종업원들도.이승기네 엄마 유지인과 승기동생, 집사 다 귀여워서 김미숙과 그녀의 미인딸이 못되게 굴어도 정화가 되고 권선징악의 구도가 '아내의 유혹'처럼 너무 스피디 하여 포스트 모던의 정수를 보여주는것도 아니고 아주 적절한 속도를 유지 하는 드라마의 정석 기승전결의 전형적인 예의 교과서 라는 생각도 든다. 게다가 인간의 보편적인 감성에 아주 깊이 다가온다. 감동이라는 이름의...
지난주 이승기의 할머니 반효정(설렁탕기업 사장)이 쓰러졌고 알츠하이머에 걸린것을 모두 알게 되는 과정에서 병원에서의 스토리가 있었다. 그것에 이어 오늘은 회복한 할머니는 퇴원을 하고 회사를 삼키려는 김미숙과 박이사와의 대결을 앞두고 있다. 이제 드라마는 위기를 넘어 절정이다.사실 난 드라마의 외적구조에 대한 비평을 하려고 이 글을 쓰는것은 아닌데... 왜 말이 이렇게 시작되었지?... 어제 의식을 잃은 할머니의 손을 잡고 한효주와 이승기가 차례로 할머니에게 못다한 말들을 하는 장면이 있었다.아버지와 있었던 2007년 그날들이 생각이 났다. 경선이와 있었던 그해 12월도 떠올랐고 다른 나의 나비들이 많이 생각나는 여름학기를 다 끝낸 휴식의 주말을 보냈던 것 같다. 반효정처럼 다시 일어나지 못 했는데도 난 아버지에게 말하지 앟았다. 나에게 '다 듣고 계시니 좋은말 많이 해드리세요' 라고 말했던 사람들의 말도 다 무시하고 난 계속 빨리 일어나서 나랑 놀자는 말만 했던 것 같다. 불면증인 나인데 왜 당시엔 그렇게 잠이 쓷아졌을까. 당시는 안유진의 베이비씨터 재직중이었는데 내가 졸음 운전할까봐 아빠는 새벽 네시부터 가라고 가라고 해서 매번 싸웠다. 아빠는 눈으로 얼굴로, 난 소리소리로..., 난 조금이라도 더 있으려고 했고 (손잡고 잠만 자면서도) 아빠는 전신에 염증이 번지는 상황이었는데도 내 걱정만 하셨다. 피곤할까봐. 당시도 아빠는 내 강의 날과 시간을 잊은 적이 없었고( 날 자랑스러워하셨던것 같다) 학교 늦을까봐 말도 못하시면서도 눈으로 매번매번 날 한심해? 하셨다. 아빠는 평생을 날 깨웠다. 끝내 죽는날까지 날 깨우다 가셨다.
어느날, 언니가 아버지한테 '무슨 생각해?" 라고 물었을때 아버지는 '발리가고 싶은 생각' 하셨는데...
아버지가 쓰러지시기 전에 그떄가 엄마가 일본에 가계실때였는데 칠순기념으로 나랑 언니랑 유진이랑 그렇게 발리 가자고(심장때문에 멀리는 못가시니깐)했었었는데 아버지는 극구 안가시겠다고 하셨었다. 내 생각엔 엄마가 안계시니깐 우리끼리 가는게 미안해서 였던 것 같다. 결국 여행은 못가고 (안면도로 언니네랑 아빠가 함께 하루 회드시러 가셨었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난 그날따라 홍대 보강이 있어서 못갔다. 강의도 달랑 하나 있으면서 참 ...)그 말을 듣고 난 아빠한테 또 막 화를 냈다. 울고 불구 그러면서... 그렇게 가자고 할때 안가더니 그러면서... 아빠 빨리 일어나, 정신차려... 꼭 살아나야되. 아빠 일어나면 나 결혼한다,가래좀 뱉어, 안 그러면 죽어..나 놔두고 죽기만 해봐.... 뭐 등등... 아빠없으면 시집도 안간 내가 어떻게 사느냐 하며 화내고...(실제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난 솔직히 아직도 너무 힘들다.)
정말 아빠한테 하고 싶었던 말은 다른거였다. 아빠가 내 아버지, 우리의 아버지였어서, 나에게 최고의 언니와 오빠를 만들어 줘서 너무 고맙다고 하고 싶었고 아빠가 진짜 너무 좋다 라는말했어야 했다. 아빠닮아 손가락이 굵은것도 좋고 엉덩이가 네모난것도 좋아( 매번 아빠를 탓했었다.), 다리는 날씬 하잖아, 아빠 닮아 가만히 있는거 좋아 하는 성격인것도 좋아, 아빠가 만든 음식은 다 좋아, 난 아빠가 다 좋았어...그리고 아빠 사랑해... 혹시 죽더라도 아프지는 않게 갔으면 좋겠는데 너무 아파해서 어쩌면 좋아, 미안해, 할 수 있는게 없어서...아빠 . 죽어도 내꿈에 한달에 한번은 와줘.난 말 안했다. 말하고 나면 진짜 죽을 것 같아서 못했다.찬란한 유산은 오늘 회복한 반효정이 있었고 할머니의 병환등을 계기로 거듭난 이승기가 멋진 연설을 하며 직원들에게 호소하는 내용이 잇었다. 난 또 막 울었다. 왜 이리 감동을 잘하는지 모르겠다.
아빠가 회복했으면 나는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그런데... 노무현대통령이나 마이클잭슨에 대한 상상은 나름대로 내용도 있고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좋을때 미루지 말고 잘하자 라는 마음도 먹고 그러는데 아버지의 반전에 대해서는 도무지 내용이 꺼내지질 않는다.그냥 많이 눈물이 났다. 쉬러 집에 오라는 엄마의 전화를 받고도 , 내일 꼭 오라는 언니의 문자를 받고도, 다음주에 뵙자는 좋아하는 제자의 문자를 받고도...많이 슬프다.
드라마 한편이 참 많은 나를 깊게도 꺼낸다.가끔 죽도록 내얘기만 크게 울면서 하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럴때 전화를 할데가 없다. 나만큼 덜 그런 사람도 없으며 다들 자기얘기만 하고 싶을때가 있으니깐...특히나 싱글들은.
결혼을 그래서(내 얘기 막 하고 싶어서) 하나 하는 생각을 말하면서 그래서 결혼이 하고 싶다고 하면 언니들은...'얘길 왜 남편이랑 하냐' 그런다. 그럼 나는 그래도 남자랑 자고 싶을때 맘대로 잘 수는 있잖아 그러면 또 언니들은 ....' 아직 철이 없구나'.그래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때 내가 나만의 가족이 있었다면 조금은 덜 허무했을 것 같긴하다. 이미 돌아가셨으니... 나의 철은 그때로 멈춰버림.승기의 '결혼해줄래'와 '너는 내 여자니깐'을 여름학기때 꽤 틀어댔다. 더 많이 틀고 싶었는데 강의가 너무 사심충만일까봐 자제했다. 나에게 좋은일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먼저는 그림도 잘 되고... 그 다음은 나쁜꿈을 안 꾸고... 세번째는 .... 그리고 그 다음은.... 9월과 11월 개인전에서 내 그림이 너무 멋진 그림이라는 소문이 났으면.... 울지말고..., 감사해라...아버지가 나에게 항상 하셨던 말씀. 또 있었지. 술 많이 마시지 마라.
아빠... 보고 싶어요.
2009/08/24
사진: 2006년 7월-8얼 아버지의 두번째 입원.쓰러지심.
DJ 서거하고 일주일이 지났네.노무현서거때 가졌던 오늘의 막연한 그 불안감은 결국 가슴을 뭉컬거리며 다가오더니 예정된 것처럼 그대로 실현되더라.김대중의 운명까지의 디테일은 나의 아버지 김대곤의 임종 당시를 그대로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 김대중의 서거로 인한 범국민적인 충격 또는 힘들더라도 어른으로서 있어주었으면 하는 마음 이전에 나는 내 아버지 김대곤과 같은 죽음의 사진을 사적인 날것으로 만드는것이 먼저였던것 같다.
입원 회복 악화 회복 ...연일 뉴스를 통해 들었던 나는 문병가는 인사들 명단으로 DJ의 상태를 알게 되곤했다. 모든 인간은 같은지라 문병오는 사람들을 보면 그 환자의 용태를 충분히 가늠케 한다.
마지막이었던가 MB내외가 문병갈꺼란 말을 들으니 이제 투석도 못할만큼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 곧 가셨다.심폐소생술에 대한 가족의 의견 그리고 자가호흡이 안되는 상황... 눈물이 나는 가족들에 둘러쌓인 임종, 참... 같았다.
이희호여사를 비롯한 가족들의 마음과 상황들이 내게는 마치 영화처럼 그림처럼 픽춰로 내 눈앞에 바로 섰다.
뉴스에선 임종당시 가족들이 '사랑해요' 라고 말했다고 하던데..우리는 울었다.그냥. 너무 차가워서.
나의 아버지. 2007년 5월11일 아침 ...아버지는 이제 투석기도 떼고 인공호흡기도 모두 제거 했고 아버지의 노란 얼굴은 침대에 드러누운 채 엄마와 언니, 오빠 경아언니 그리고 나의 바닥에서 둥둥둥 떠있는 상태를 아마도(?확신은 전혀없다)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느덧 정적의 시간은 흐르고..., 엄마는 예배를 제안했다. 엄마의 인도에 따라 커튼이 쳐진 중환자실안에서 우린 예배를 드렸다. 예배가 하느님께 드려졌는지, 드리는지... 난 도통 관심도 없었고... 그것은 언니 김은영과 오빠 김종민도 같았나보다. 우린 내내 '수치'만 쳐다봤다. 엄마와 경아언니가 친송을 할때도, 엄마가 시편을 낭송할때도 이미내려가있던 '수치'는 변함이 없었는데... 주기도문을 시작하니... 마구... 떨어지더라. 그리고...'아멘'에 맞추어 버저가 울렸다. '띠.......................-' . 아멘과 동시에 아버지는 한줄기 눈물을 흘리셨고 그대로 아버지의 숨은 멎었다.아빠는 그렇게 갔다.
김대중대통령 입관때의 사진을 보았다. 통곡하는 이희호여사 그리고 가족들....아버지 김대곤의 입관때 나는 그야말로 통곡을 했다. 아빠의 혈압과 맥박이 제로로 나왔던 당시는 어디로 갔는지...아빠가 ... 차가웠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아버지의 얼굴을 스다듬으니 그제야말로 아버지의 '숨'이 여기에 없다는 걸 알았나보다.아빠는 숨없는 여기에 이틀을 계셨다. 부폐되지않는 냉장고에서... 더이상 나와 우리와 사람과 의 삶이 아닌 그 곳에서... 그렇게.
그리고 나는, 그렇게 김대중대통령 가는 길을 함께했다.
사실 , 노무현대통령서거때보다는 덜 충격이다. 난 DJ를 존경할 만큼은 몰랐고 내 세대엔 노무현의 역할이 그야말로 절대적이었던데다가 , DJ의 임종은 마치 내 아버지 김대곤의 45일처럼 준비했기 때문인것 같다. 돌아가신 후 이제야 알게 된건... 노무현도 DJ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지금의 이만큼이라도 남한이 되어있는것은 DJ가 있었기 때문....그래서인지 나는 스물스물 힘이 없다. 누가 대신할까... 이런생각도 들고...나의 아버지 김대곤은 김대중을 싫어했다. DJ가 싫다는 이유로 YS를 찍을 만큼 싫어하는 평범함 TK. 아버지는 DJ가 전라도 여서 싫다고 하셨다. 그러면 나는 아빠랑 너무 잘지내는 내가 아는 몇명의 친구들 이름을 대며 '아빠 그아저씨들은?' 이라고 물으면 잠깐 주춤 하면서... 그건 예외야... 하셨지. 그리고 내게 선이 들어온 남자가 전라도 출신이었는데 선보기 싫었던 나는 '아빠 전라도 싫어하잖아' 그러면 '다 그런건 아니야' .
몇번의 대선과 총선으로 아빠와 나는 말도 안하고 지낸적도 있다. 난 아빠를 설득해서 한표라도 얻으려 햇지만 아빠가 말을 안한 이유는 나를 설득하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그냥 투표의 권리만 묵언으로 행사할 뿐. 나의 아버지 김대곤은 단 한번도 'DJ를 찍지마라' '노무현을 찍지마라' ... 말한적이 없었다.심지어 미군기지이전 반대로 평택가는것, 노통탁핵등 촛불시위 가는 것..., 한번도 나를 말린적이 없다. 그냥 아빠는 노무현과 김대중을 싫어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찌 그런것이 가능하겠는가.... 아버지 김대곤은 대구 경북중고대학교에 군인장교 출신인데 말이다. 지극히 보수적인 그런 우리 아버지. 딸이 피던 담배를 고대로 그 자리에 놓아두고 떡이 되게 취해온 새해 첫날 꿀물을 타주면서 다른 가족들에게 '김지애깨우지 마라' 고 말하는 그런 사람안데... 내가ㅑ 잊을수 있겠나, 가능하나, 안 보고 싶겠나...,아버지는 우리 삼남내가 어렸을때부터 주일이면 밥을 해주시고 퇴직이후엔 모든 집안 살림을 다 해 주셨다. 심지어 미국 오빠네 갔을땐 며느리 경아언니 퇴근에 맞추어 예쁘게? 밥상을 차려주셨다. 난 아버지가 나한테만 그리도 지극하게 하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아버지가 관대하게 대해야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언제나 최상의 배려를 하셨음을 의심할 수가 없다. 우리 아버지 김대곤은 그런 사람이었다. 세상을 변화시키거나 나라를 바꾸지는 않았을지라도 아버지는 아버지 김대곤 가정의 최대의 민주주의를 이루웠으며 (솔직히 자신의 희생이 너무 컸다) 아버지의 딸의 존경을 받는 나머지 잊을 수 없어 힘들게 까지 한다. 물론 싱글이 아니었다면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개인의 자유' 인정. 그 모범을 어찌 잊으리.
김대중대통령 가시는 걸음... 나의 아버지 김대곤 생각을 많이하게되었었다. 동시에 ...참 보고 싶은 사람들이 한명한명 늘어만가니... , 생명 그리고 생명없음이 어떤 차이인지의 궁금함이 깊게만 스며든다. 사후경험의 공통좀은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한 빛'이라는데 .......,그 빛 다음엔 정말 얼굴과 얼굴이 거울로 보는것 처럼 보게 되는걸까....
2010/02/13
'영원하길 바라는 그 순간이 생긴다면 바로 그 때가 인생 최고의 날이다 ' 라는 말이 있듯이...가라앉는 나의 기분을 올려 보려고 시도 하는 것들 중에 하나는 '위시 리스트' 만드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나에게 '그 순간'이 언제였는가를 곰곰히 떠올려 보는것인데.한동안 ... 난 그런 순간이 없었던것 같았다. 전기 후기 내리 4번을 떨어지고 3수 끝에 대학에 붙었을때? 뭐 첫 개인전을 했을때? 또는 연애를 시작했던 설레였던 어느날? 성탄절? 노무현대통령 당선날?.... 새 작업실을 다 정리한 날?...첫키스?...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감사하긴 했지만 영원하길 간절히 바랬던 그런 날들은 아니었던것 같아 난 정말 비관적인 사람인가 하고 있던 어느날....어느때...번뜩!그런 순간이 있었다. 내게 그런 날이 이었고 하지만 그 날 그 순간은 정말 찰나같이 지나갔지.
쓰러진 아버지...내내 신경외과 중환자실에 계시다가 약간 호전된 어느밤...아버지가 복통을 호소했다. 계속 의사를 콜하고 통증을 말하고 그랬지만 무슨 종합병원이 그즉시 ct를 안찍고 결국 다음날 오전에 촬영을 했는데 담낭염 수술을 해야 했으며 외과의에 의해 수술이 진행됐었다. 간단한 수술이었지만 아버지 상태가 그 수술을 견딜 수 있을지 알수 없는 상황이어서 아버지가 돌아가실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된 그날.... 수술을 마치고 수술방문을 열고 나오는 침대위의 나의 아버지... 내가 '아빠' 하고 불렀더니 나를 쳐다보면서 꿈뻑하셨다. 아빠가 참 귀여웠다.그래 바로 그때... 그때였네.
그 앞도 그 뒤도 아니고 ....바로 그 순간 1분... 중환자실에 들어가신 후 걱정은 또 걱정대로 되긴 했지만 당시만 같았으면 난 세상의 모든 착한 일은 다할 거 같았고 내 일도 열심히 할꺼라 그 1분 영겁의 시간을 보냈지...
그래. 그날이었네...그 날 거기서였네.아버지의 장기들은 담낭을 선두로 그 날로 부터 하나하나씩 실망스럽게도 구겨져가다가 결국 내 생일 하루전에 다 끝났지. 그랬지.
직업이 화가라 그런가...사진처럼 선명하게 아버지의 병상모습이 한장한장씩 스틸컷으로 픽춰가 선다. 특히 명절을 앞두면 심하게 나는 ....그 1분이 아니더라도...그냥 온몸이 노랗고 온몸에 10여개의 튜브를 꽂은데로라도... 그냥 꿈뻑 한번 하는 아빠가 보고싶다. 전시를 한달 앞두고 있어서 더 맬랑콜리해 졌나봐.
그래도 이번 명절은 가라앉는 마음 잘 이겨내고 보내야지.
2010/06/14
3주기가 지났다.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3주기 그 날 연남동으로 이사했다.5얼11일.비도 내렸었고,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두렵기도 한 그런 마음이 추적추적거리면서 아버지에 대한 생각과 함께 내 이삿짐들을 적셨다. 꼭 내 그림들이 우는것 같았다. 좋아서...
지난주 . 비로소 새 작업실 정리를 끝낸 후 우리교회 목사님들과 몇명의 친구들이 와서 예배를 드림. 일부러 이 날이 되기까지 누구도 여기에 못오게 했다던 나. 하느님 앞에서 시작을 선언하고 싶기도 했고 왠지 나한테 흐르는 침울한 기운을 홱 몰아내어 주지나 않을까하는 주술적 믿음이 그렇게 했던 것 같다. 악도 선으로 바꾸시는 하느님이 나를 좀 일으켜 주시길... 간절히 바라며 작업실 아깝지 않게 차고 넘치는 영감으로 창조적인 표현을 하는 그런 그림을 그렸으면... 좋겠다. 나는 ... 그랬으면 좋겠다.나는 이제 다시 구로동집에 들어가서 엄마와 히도리 짱아와 함께 살면서 출퇴근 하는 화가가 되었다. 큰 결정이었지. 집으로 다시 들어가는것은... 하지만 '그림을 제대로 잘 하기 위해' 난 과감히 결정했고 그 결과 이런 작업실을 갖게 되었는데...부끄럽지 않게 ...내가...그림을... 잘...그릴수 있었으면 ...
이사하는 과정에서 아버지 생각이 이루 말 할 수 없이 많이 났다. 아버지는 나의 '너무 많은것들'을 간섭하셨었다. 그래서... 난 아직도 그 날처럼 그립다. 이젠 시간도 많이 지났고 나도 불혹을 앞두고 있으니 징징대는것처럼 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얘기를 어디에도 할 수가 없다. 기도 할 때... 하느님께 철좀 들게 해달라고 말하곤 하지. 나한테서 가장 큰 문제는 그림인데... 아버지가 없으니깐 솔직히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대상이 없어진 것 같아 그림 그리는게 아직도 힘겹다. 그래서 나는 어서, 그리고 빨리 아버지에 대한 향수를 건강함으로 바꾸어야 화가로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구로동에 가는건 ...물론 엄마와 잘 지내는게 힘든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곳곳에서 떠 오르는 아버지때문이다. 이쪽을 바라보다 눈물이 흘러 고개를 돌리면 또 눈물이 흐르고 그러다 또 발걸음을 떼어 한 걸음 걸어보면 거기엔 폭포수 같은 샤워기 같은 눈물꼭지가 있다. 제일 싫은 건... 지하주차장이다. 아토스를 세우고 아빠 팔장을 끼고 쫄래쫄래 엘레베이터까지 가던 그 길 그 20m가 내 아버지의 부재를 그저 실감하기에 횡경막을 쥐어짜듯 내 가슴이 턱 막힌다. 그러다 또 뭉클. 엘레베이터를 타서는 옆의 거울을 보며 내가 '아빠 나 늙었지?' 그러면 아빠는 '아 니' 내가 ' 아빠 나 못생겼어?' 그러면 아빠는 '무슨소리.. 예쁘기만 하네' 이런 대화를 정해 놓은 것 처럼 반복했다. 지금은 리모델링한 그 엘레베이터...고맙다.
지난주 엄마의 얼굴에 있는 점을 빼드렸다. 장난 아니었다. 65개가 넘었다. 하고 나니 얼굴이 너무 깨끗해 진 엄마. 엄마의 기분도 좋아지셔서 피부과가는길에 엄청 혼났던 나를 더이상 혼내지 않으셨다. 엄마를 보면서 좀 더 빨리 신경을 써드릴 껄... 하는 느린마음에 대한 자책과 함께 아빠 돌아가시기전에 검버섯을 빼드렸어야했다는 아픈 생각이 또 들었다. (... 이 글을 읽는 나의 친구들... 더 늦기전에 엄머아빠 점을 빼드리세요아이피엘도 해드리고요... 병원소개할 수있음)
지난주 ...어느 아침... 아빠 영정사진을 보면서 빼야하는 점들을 세어 보았다. 42개....
정리가 다 된 작업실에 이렇게 혼자 앉아있는 첫 날.그냥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다신 못 본다는 사실에 갑자기 너무 슬퍼져버렸다. 이렇게 좋은 작업실을 갖게 되어 고맙고 이런 작업실에서 멋지게 그림 그리는 나를 보여드릴수 없어서 이런것 같다. 이제...좋은 일은 슬픔을 배가 되게 한다. ...6월14일이사한 지 한달이 넘은 오늘.바닥에 눈물 좌표를 그리며.
2010/09/16
사진: 1999년8월 석사학위수여식날 아빠와 함께.
난 ... 좀 맞았다.덕분에... 거짓말을 안하게 되었고 엄마한테 함부로 말하지 않게 되었다.
난 어렸을때 가짓말을 많이했던 것 같다. 내가 기억력이 좋지는 않지만, 크게 맞은 기억은 생각이 나는데...그 일들은 언제나 내가 거짓말을 할 때였던 것 같다. 집에 있던 돈을 훔치다가 걸려서, 당시엔 고가였던 샤프 팬슬이랑 시계를 잃어 버렸는데 (뭐든 잃어버리거나 망가뜨렸다) 거짓말로 무마하려고 해서 종아리를 맞았다. 난 그 기억이 난다.어느날은 무엇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종아리에 시퍼런 멍이 들게 맞은 적이 있었다. 그 다리로 내가 걸어가니... 이웃 사람들이 날 보고는 ' 너 맞았구나, 혼났구나.!' 했고 챙피했던 나는 ' 흥 , 타이즈 신은 거에요! ' 하고는 막 도망쳤던 웃낀 장면도 기억에 있다.
어렸을때는 , 엄마가 아빠한테 말하면 아빠가 종아리를 때렸던 것 같다. 하지만, 초등학교 고학년 사춘기 이 후에는 아빠한테 맞은 일들은 없었는데...(물론 그 이후때는 엄마한테 꽤 맞아터졌었다. 예전엔 왜 삼남매중 나만 때리나 했었는데 성인이 되고 철이 든 후에 생각해 보니... 맞을 짓은 나만 했었다.)
십대때 아빠한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얻어터진 적이 있다. 중학교때였는지, 고교때였는지, 나 김지애가 엄마한테 나만 들리게 mcn을 날리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분노한 (그 일외에는 힌번도 사람듣게 욕을 한적이 없음, 아이 스웨어) 아빠가 그 즉시 의자를 들고 패대기를 쳐서 집 밖으로 내 쫏긴일이다.참으로..., 부끄럽지만..., 내가 그랬었다. 사랑도 많이 받았지만 응징도 거세게!!!오늘은 이상하게 그런 기억들이 자꾸 생각이 난다.왜 이런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아빠의 막힌 혈관들, 심장과 뇌 혈관...이 내 탓인 것 같기도 하고,그래도 우리 삼남매중에 날 제일 예뻐했던 아빠가 그립기도 하고,내 마음의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꿈에서라도 그 기회를 갖고 싶기도 하고...,내 흡연과 음주를 용인해 주면서 '조금하라' 한 아빠가 지금 생각나기도 하고...,이렇게 좋은 작업실에서 불안해 하는 내 마음을 아빠한테 말하고 싶기도 해서 인것 같다.아마도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겠지..., 감사해라.
2011/05/08
노란 아빠와 뽀얀 딸 '그게 마지막인 줄 알았었다면...' 먹먹한 가슴.
따라오는 또 한마디 '왜 꼭 그렇게...' 보고싶다. 오늘도.
4주기 추도예배 후 대전현충원 빗 길. 예쁜 막내딸 김지애. 그리고 잃어버린 아빠가 첨으로 사 준 반지...
2012/05/11
벌써 5년. 언니오빠네가 미국에있어 엄마, 아빠의 친구 황아저씨 장아저씨와 동행. 아저씨들은 절을하시고 (사실 나도 절하는게 좋다), 엄마의 인도로 예배보고 도시락을 아버지앞에서 먹고 귀경. 친구분중에 울기는커녕 잘웃지도않는 친구분이 아버지 돌아가시니 통곡을 하셧다는, 아빠의 부하 소대장아저씨들이 와서 많은 눈물을 흘리신다는, 욕하나 못하는('빙시'는 예외 우리삼형제포함 공통욕~ 운전을 개같이하는 사람을 대할때등^^) 사람이 중령까지 단걸 친구들모두 신기하게 여겻다는, 초딩때부터 성격이 한결같은 유일한분이런얘기..., 그리고 엄마를 향한 한없는 사랑..., 뚝뚝 흐르는 짧은 눈물에 내 그리움은 운전대에 묻었다. 동기들중에 신성일 담으로 출중한외모와 최고의 배려심을 가진 아빠 김대곤. 친구들이 참으로 그리워하신다. 그 말없으신 분을. 5년. 이제 내차례. 돌아가신 아버지 이름에 누가되지않게 예쁘고 건강하게 잘살자.
'My writing > ~2013' 카테고리의 다른 글
Pleasw tell me 'SORRY' (0) | 2012.07.09 |
---|---|
Series of 'NO MONEY' (0) | 2012.07.09 |
Series of 'PUNISHMENT' (0) | 2012.07.09 |
Thought of my niece EugeneAhn 2 (0) | 2012.07.02 |
Thought of my butterflies 1 (0) | 2012.05.08 |